2020.12.31

“뭔가 찾고 있나본데” 

막 뒷산에 다녀온 나를 마틴이 졸졸 쫒아다녔다. 

“나한테 무슨 냄새가 나나”

식탁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자마자 등과 등받이 사이 비좁은 틈을 비집고 올라와 내 엉덩이 쪽을 킁킁대더니 다시 의자 밑으로 내려가 이번엔 허벅지 뒤에 제 코를 박고 수색을 계속했다. 

“나무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냄새가 배었나봐. 뒷산에 고양이들도 많은데…”

아까 큰 상수리나무 잎을 보러 내려가다 계단에서 빼곰히 머리를 내밀었던 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머리를 스쳤다. 순간 나는 벌이 된 기분이 들었다. 꽃가루를 제 몸에 뭍히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 다른 꽃에 수정을 시키는 벌. 나를 벌이라 생각하기에는 너무 크고 마틴은 너무 작은 꽃이긴 하다. 마틴은 나를 통해 자기와 같은 종의 흔적을 발견한걸까. 내가 다른 종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는 행위를 한걸까. 내 위치가 소외된 관찰자에서 실어나르는 역동적인 무언가로 변경된 것 같았다. 

지난 며칠동안 뒷산에 가지 않았다. 마지막 갔던 날은 강일이의 표현을 빌자면 기분이 잡쳤던 날이다. 그날따라 뒷산에서 두명의 중년 아저씨와 연이어 마주쳤는데 그 만남은 유쾌하지 않았다. 한명은 목청을 높이며 노래를 불러댔고, 다른 한 명은 그런 그를 또라이라고 칭하며, 내게 이 곳에 오면 어딘지 불쾌하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순식간이라 그말들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나는 그 불쾌했다. 

그 말이, 소리에 뒷산은 일순간 황량해진듯했다. 많은 쓰레기가 곳곳에 눈에 띄었다. 내가 이곳을 사랑하는 애정의 정도가 고작 말 한마디의 무게보다도 가벼운 정도라는 데에 시무룩했고, 황폐한 곳인데 내 스스로 그것을 은폐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 혹은 이곳에 올 때마다 불쾌하다고 제멋대로 말하는 그 단  사람의 생각마저 설득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산책자라는 생각에 휘청댔다. 아주 작은 자극이었음에도 나는 시험당한 기분이었고, 그 시험을 망친 기분이었다. 강일이는 그건 과장이라고, 그냥 기분이 잡친거라고 정리해주었지만, 며칠동안 뒷산에 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이 나를 유일하게 그곳으로 이끈 이유였다. 

*

국수나무라 불리는 지그재그 모양의 가지를 가진 덤불이 햇빛을 희게 반사하고 있었다. 그 때 작은 박새 하나가 나무 윗쪽에서 소리를 냈다. 자주 듣는 프레이즈가 아니네. 작은 껍질을 까는 소리를 내며 고음으로 제 소리를 냈다. 산 아래에서 여행가방 바퀴가 구르는 소리와 공사장 소리가 올라왔지만 나는 그 작은 박새가 입과 몸으로 내는 소리에 완전히 집중해 있었다. 작고 검은 열매가 든 콩깍지 처럼 생긴 허연 껍질을 까며 고음의 목소리로 프레이즈를 말하는 새.   

낙엽이 몸을 오므려 덜덜 떠는 소리를 냈다. 가지에 매달린 낙엽 중 유독  혼자만 계속 진동하는 낙엽이 있다. 

가시도 길게 자랐다. 

위에서부터 하얗게 변하는 나무들이 하나 둘 많이 눈에 띄었다. 이곳을 올해 자주 왔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다. 주위에 잎이 무성할때는 무성한 잎에 가려서, 아침 해가 뜰 때는 빛에 반사되어 가지가 희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얗게 변해가는 나무들은 소위 고사목이라 부르는 죽어가는 나무들이다. 심지어 사진을 찍으면 유독 예쁘게 나왔다. 하얀 반점이 보이는 나무를 보고 있다. 저 나무도 점점 더 많은 부위가 하예지겠구나. 

나무가 죽는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나무의 죽음은 나무의 삶의 일부로 역할과 기능을 갖기에 나무의 삶과 죽음은 분리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내가 좋아했던 뒷산에 죽어가는 나무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이 조금은 나를 김빠지게 했다. 쓰러진 나무, 뿌리가 뽑힌 나무들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하예지는 나무의 가지를 보는 것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폐허를 폐허인지 모르고, 무덤이 무덤인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것. 

나무에서 떨어져나온 황톳빛 껍질은 육각형으로 메마르게 갈라져있다. 

영하 12도. 햇볕은 따뜻했다. 

불안해하지 않고 내가 집중해서 내일을 하고 죄책감없이. 

산 아래 주택과 빌라의 옥상은 징검다리로 빛을 발하고 있다. 태양의 방향 아래 정렬된 그 빛은 물비늘처럼 환하다. 

엉킨 가지들은 엉킨 목소리를 낸다.

음악에 무언가를 담아보려고 애써본다. 움켜쥐어보려고도 해본다.

그런 생각에 잠겼을때 여전히 많은 잎을 단 큰 상수리나무가 솨솨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폭포처럼 끊김이 없었고 실처럼 여러 겹의 멈추지 않는 소리를 냈다. 다가가 잎의 모양을 눈으로 확인했다. 하나일 때 그리고 여럿일때.  

창백한 잎에서는 윤이 났다.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듯 천천히 뒷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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